로이드 존스는 어릴 때부터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가 느낀 능력의 주체는 숙명론이나 운명론이 아닌 모든 사건의 과정을 이루시는 인격적이며 초자연적인 권세였다.
 
그는 어린 시절 ‘다니엘 로우랜드(Daniel Rowland, 1730년대에 부흥을 이끌었던 목사)’가 목회한 바 있던 랭게이토 교회를 다녔는데, 당시는 로우랜드가 목회하던 시절만큼 뜨겁지 않았고, 냉랭했다. 이 때의 교회에 대한 로이드의 추억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목사님은 도덕적이고 율법주의적인 분이셨고, 옛 교장선생님 같은 분이었다. 그가 복음을 설교한 경우가 한 번도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복음에 대한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사경회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당대의 걸출한 설교자들을 초청한 적도 없다. 비록 그 마을에 로우랜드의 동상이 있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곳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저 전통에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20대 초반에 들어갈 때쯤 그는 그동안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자기가 이제까지 사실상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아주 여러 해 동안 사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그러한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나는 교회의 멤버였다. 우리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였고, 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런던으로 이사온 이후 의사시절 로이드 존스가 다니던 채링 크로스 교회의 목사였던 Peter Hughes Grifith는 자기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로 전제하고 설교하는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의 설교는 이성이나 양심에 거의 호소력이 없었다. 그는 성경과 신학을 설교하기보다는 예화와 일화를 많이 들려주었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그저 감정을 자극하기만 했다.
이러한 설교를 듣던 로이드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나로 하여금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그러한 설교였다. 또한 회개하게 하고 나에게 중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설교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언제나 듣는 설교는 우리가 모두 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정 하에서 작성된 설교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거기 회중석에 앉아 있을리 없다는 전제에서 행해지는 설교 말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여러 해 동안 모든 교단을 통틀어서 웨일즈에서 가장 잘 한다고 알려진 설교들의 설교를 들었지만, 그들 중에 한 사람의 설교도 내 양심을 건드리지 못하였다. 인기있는 설교자들 대부분은 어떤 사람도 회개케 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저 숙련되고 수사적인 방식으로 주제를 논의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면 그것만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1923년 초기에 두드러지게 복음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의 이해에 무언가 보탬이 되는 설교들을 듣기 시작했다. 당시 채링 크로스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교회로 옮겼었는데, 그 교회의 존 휴튼(John Hutton)이라는 목사였는데 그의 설교가 어찌나 회중들을 사로잡는지 로이드 존스는 후에 이 설교자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이 사람의 설교는 정말 내게 큰 호소력을 가진 것이었다. 나는 그가 그 교회를 목회하는 동안 설교를 듣기 위하여 매주일 아침에 꼭 참석하게 되었다.”
휴튼의 설교가 사상이나 효과적인 면에서 한결같이 균형잡힌 것은 아니었다. 강해적인 설교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로이드 존스의 사고에 뭔가를 더하여 주었다.
“그의 설교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깊은 감동을 주었다”라고 회상한다. 휴튼의 설교를 듣게 된 젊은 의사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이 행동하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특별히 의사로 일하면서 인간의 문제가 신체나 지식에 있지 않고 도덕적이며 영적인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영적 빈곤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문제는 내가 그릇된 일을 한다는데 있지 않고 내 자신 즉 존재의 중심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데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런던의 빈민가에서 의료활동을 하고 이스링톤의 불결한 지역에서 수련을 하던 중에 그의 생각에 극적인 영향을 주는 일들을 경험하였다. 내과진료를 통해 술취함과 성적 부도덕의 참혹한 결과를 본 그는 런던에 거주하는 가난한 자드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상류층 인사 가운데도 상당수가 안식하지 못한 채 술과 성생활의 방종으로 망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생활 가운데 그가 관찰한 세상에 대한 분석은 자기 자신의 죄악성에 대해 느끼는 심각성의 정도가 강해지는 데 기여했다. 그는 죄라는 것은 그러한 죄행들이 일반적으로 부도덕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욕심 자체가 무언가 잘못이 있음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마음의 욕심’이라고 불렀는데 - 곧, 교만과 질투와 시기, 악의와 분노와 원통함 등-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죄라고 하는 질병의 모든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진단은 더 나아가서 성경과 그의 체험을 통해 자기는 실제로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였음을 알았다. 그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의 지배적인 원리를 발견하였다. 자기 마음에만 관심을 갖고,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그러한 원리가 자기의 타락한 본성의 궁극적인 증거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바르지 못한 관계에서 나오는 열매임도 알게 되었다.

“‘죄’란 마음과 영혼과 네 모든 생각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자세와 삶에 대하여 정반대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계명을 지키고 있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바로 죄인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훌륭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고 있지 아니하다면,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그는 이 진리에 대해 자신의 간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만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나 내가 행한 것이나 말한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내가 죄인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내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의 노예이며, 마귀의 노예이며, 육신의 노예였음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습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영원한 형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내 모든 문제와 모든 아픔의 진정한 원인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죄를 사랑하는 악하고 타락한 본성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은 저뿐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제 문제는 내가 악한 일들을 했다는데 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의 존재 근원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몇 일간이나 몇 주 내에 그에게 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회심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그것은 점진적인 일이었다.
25세가 되던 해에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후일에 고백하기를 “지난 날 동안 나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상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단 한번도 신자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나의 참 필요는 죄를 깨닫게 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런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들었던 설교는 언제나 우리 모두가 신자라는데 근거한 설교 뿐이었습니다
 
포도나무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