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게 찾은글인데,, 한번쯤 읽어볼만한 글인듯 해서.. 올려봅니다.~ 



★ ⑴ 교만

 
‘사탄학’을 연구해보면 사탄은 적어도 열 가지의 전술을 통해 인간을 유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래 되었으면서도 효과적인 사탄의 유혹 방법은 바로 교만이란 무기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교만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는 음행도 ‘이제 이만하면 됐다. 모든 것이 다 내것이다’는 교만 때문이었다. 또 다윗이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인구조사를 한 것(삼하24:10)도 그의 교만 때문이었다. 이처럼 교만은 가장 오래된 사탄의 전술로 지금도 사탄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무엘하 17장 11절에 보면 후새가 압살롬에게 권한 모략의 내용이 나온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그의 교만을 충동질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 교만은 압살롬을 멸망케 만들었다. 사탄은 교만이라는 미끼로 인류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을 수없이 걸려들게 만들었다. 

사도행전 12장 23절에는 신약의 대표적인 사건이 나온다. 헤롯 아그립바가 교만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충이 먹어(암의 일종) 죽은 일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온다.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눅18:9). 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곧 토색과 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라고 기도했다. 사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별되게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책망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 지도자로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여긴 교만 때문이었다. 교만한 사람들은 남을 업신여긴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경고했다. 

★ ⑵ 절망 

교만이 사탄의 부추김이라면 절망은 사탄의 방해 작전이다. 성도들을 낙심케 함으로써 하던 일을 중단케 만드는 방법인데 이는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효과가 있다. 교만에 안 넘어가는 사람도 이 방법에는 쉽게 넘어간다. 
교만은 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적용되고 절망은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적용된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실패의 쓴 잔을 마신다. 실패가 계속될 때 사람들은 낙심하고 절망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정확한 직관이다. 
절망은 자포자기나 자살에 이르는 병이기 때문이다. 절망은 낙심으로 시작해 자살로 이어진다. 최근 들어 빈번하게 발생하는 자살사건들은 바로 절망의 표현이며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절망이 영적 전쟁에서의 사탄의 전술이란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절망의 줄을 잡고 있는 사탄의 손을 보지 못한다.

절망은 믿음이 없을 때 생기는 현상이지만 심지어 믿음이 좋다는 모세나 엘리야,베드로의 경우에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을 꼭 붙잡아주셨기 때문이다.
이사야 41장 10절은 많은 사람을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준 구절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런 고백을 한 일이 있다. 그가 박정희 정권 때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연금되고 금식투쟁을 할 때에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으며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으나 성경의 이 구절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어찌 그뿐이겠는가.
필자도 이 구절에서 큰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게 됐다. 시편기자도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며 방황할 때에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121:1∼2) 오는 것을 깨닫고 유명한 시편 121편을 통해 여호와의 지켜주심을 고백했다. 

★ ③ 비교의식 

C S 루이스는 현대의 마귀는 비교의식을 통해 인간을 유혹한다고 했다. 이 비교의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기도 하며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자기 남편과 친구의 남편을 비교해 수입이나 출세에 차이가 있을 때 좀 나으면 교만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절망한다. 반대로 남편도 자신의 아내를 다른 친구의 아내와 비교하며 교만해지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학생들이 1등을 하려는 비교의식 때문에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불게 되고 학교의 비교의식으로 천문학적인 교육비가 들어간다. 
그러나 학교에서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사회에서 출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유연성과 적응성 부족으로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대인들의 ‘something different’(남과 뭔가 다른)한 교육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많은 천재를 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은 우리의 비교의식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절대빈곤층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상대적 빈곤인데 그것은 바로 비교의식에서 나온다. 과거 일제시대나 6·25 전쟁,60년대 이전의 시대를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는 너무도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교만하며 낙심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영국의 속담 가운데 ‘구두나 장화나 구두걸음이나 장화걸음이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곧 ‘오십보 백보’라는 뜻이다. 독일의 금언에는 ‘점잖은 것과 익살스런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다. 비교해봤자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 22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자신을 요한과 비교하려는 베드로를 향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갈라디아서 6장 4절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교는 주님과 해야만 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결코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과 비교할 것을 교훈한 것(고후 1:12∼13)은 사탄의 전술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 ⑷―의심과 불신 

본래 의심은 사탄이 하와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독초였다. 이것이 들어가자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다. 물론 의심이란 때로는 진리 탐구의 자극제가 되기도 하지만 신앙에서는 큰 장애물이 된다. 왜냐하면 의심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스피링 부인은 “의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이라고 했다. 따라서 의심은 지식의 현관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다음은 불신인데 이 불신은 거짓말의 믿음이요,지옥으로 인도하는 안내자다. 불신은 개인적으로는 실패의 원인이 되며 사회적으로는 협동을 깨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의심과 불신 뒤에는 항상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의심과 불신을 통해 사탄이 인간을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밤에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사건이 나온다. 이때 베드로가 자신도 물위로 걸어가기를 간구했다. 주님은 허락했다. 처음에는 베드로가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으나 나중에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며 의심하게 됐을 때 물에 빠졌다.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의심을 경계한다. 

그러나 뉴턴이 ‘왜 사과가 나무 밑으로 떨어질까?’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유인력 법칙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진리 탐구에는 의심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영의 세계는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문제는 불신이다. 지금 세상은 온통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부부가 서로 불신하고 있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 불신한다. 정부와 국민도 불신으로 가득차 있다. 불신이 있는 곳에는 놀라운 역사도 없고 연합도 없으며 사랑도 없다. 오직 분열과 미움,실패가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불신이 더 이상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사람들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

★ ⑤ 거짓말 

거짓말은 사탄으로부터 시작돼 세상에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거짓말이란 도대체 그 본질이 무엇인가? 잠언 6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6∼7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17절에서 거짓된 혀 즉,거짓말을 지적하고 있다. 거짓말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지는 십계명 9번째에 나온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출 20:17) 
십계명의 구조를 보면 제9계명은 인간관계에 관한 말씀 중 하나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바로 거짓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이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인데 거짓말은 이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버린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 중에 하나가 언어다. 물론 동물도 소리를 통해 자신의 본능적인 표현을 하지만 인간의 말처럼 논리와 감정,예술이 깃들어 있지 않다. 말을 통해 문화가 형성되고 문명이 발전한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하나로 ‘진리의 허리띠’를 말씀한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끈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남의 말을 하는 사람들 즉,루머를 만들어내고 잡담과 험담을 말하는 하류층의 사람들이 있고 둘째는 시사를 말하는 사람으로 이들은 정치와 예술을 말하는 중류층의 사람들이다. 셋째는 진리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말을 통해 사람됨됨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거짓말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때 거짓 증인 둘을 세워서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말하게 해 그를 죽게 한 것에서 잘알 수 있다. 
거짓말이 인간관계를 깨뜨리기 때문에 옛날 로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게 했으며 애굽에서는 코와 귀를 잘랐다고 한다. 이처럼 거짓말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사탄의 거짓말 전술에 넘어가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거듭나서 마음이 깨끗해야 되고 입의 훈련을 통해서 바른 말을 해야 할 것이다. 

★ ⑥ 미움

사탄의 여섯번째 전술은 미움이다. 미움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따라서 미움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이복형제와 같다. 오히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가는 것은 쉬우나 무관심에서 사랑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미움의 역사를 보면 가인과 아벨에게서 시작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미움의 뿌리는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됐다. 자신은 인정받지 못하고 동생만 인정받는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동생을 살인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사탄의 미움을 통한 복음이 민족주의와 종교를 통해 전 세계에 번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따지고 보면 인종적으로 서로 피가 통하는 관계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미움이란 사탄이 인간에게 뿌린 영적 전염병이기 때문에 일단 이것이 마음에 들어가면 암처럼 곪게 되고 마침내는 터지게 만든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전쟁이 없었던 시대가 별로 없다. 그런데 그 전쟁의 원인을 살펴보면 극단적 이기주의와 민족주의적 보복과 미움에서 비롯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미움은 감기처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번진다. 남북간 미움의 관계도 처음에는 이념의 차이에서 시작됐지만 이제와서는 과거의 응어리에서 더욱 곪아지고 커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미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것은 성경적으로만 가능하다.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 더하기 표시로 된 것을 볼 수 있다. 영어에 속죄(at-one-ment)라는 단어를 보면 ‘하나’라는 뜻을 가진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화목이 이뤄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사건 없이 미움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가 된다. 미움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희생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해결된다. 미움의 장벽은 사랑으로만 무너지기 때문이다.

★ ⑦―불평과 원망 

구약성경 가운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민수기이다. 민수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기록한 것인데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불평과 원망으로 얼룩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목이 마르다고,길이 나쁘다고,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고 원망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다베라에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줘서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4∼5절)이라 하며 불평과 원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불평과 원망의 속성은 점점 심해진다는 점이다. 
즉 불평은 또 다른 불평을 낳고 원망은 또 다른 원망을 낳는다. 마침내 불평은 습관이 되고 만다. 그러나 불평의 내용을 살펴보면 문제가 커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좁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불평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비신자들의 형통은 비교하는 데서 오기도 하고 별로 믿음이 없는 다른 신자들이 잘사는 것을 보면서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재판장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이 불만 바이러스가 독감보다 더 강하게 역사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불만 바이러스는 쉬지 않고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자기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불평과 원망이 감사로 변한다. 
필자도 지금까지 내가 원한 것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했으나 지난뒤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이뤘고 더 많이 받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불평과 원망은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평과 원망의 병을 치유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다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감사의 조건을 삼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내게 가장 좋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의 기준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 ⑧ 지연 

사탄의 여덟번째 전술은 지연작전이다. 사탄은 우리가 선한 일을 계획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선한 일을 계획하면 그것을 지연시킨다. 그것이 사탄의 전술이다. 
우리는 해마다 ‘올해엔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생활을 해야지’라고 결심하지만 사탄은 그 시작을 지연시킨다. 그래서 항상 계획만 세우다 해를 넘긴다. 우리는 내일을 말하고 미래를 계획하지만 사탄은 우리가 내일을 말할 때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 지연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일을 지연시키는 것은 나태하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지연작전이 사탄이 우리들에게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전술이란 점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현재’를 말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또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5:16)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성공하기를 원하는데 이 성공은 행동할 때 오는 것이지,가만히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가고 만다. 다시 말하면 성공의 기회는 잡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기회란 무엇인가. 기회란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을 말하는데 그때 중요한 것은 바른 선택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결단이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많은 장애물이 있는데 그 중에 지연작전은 우리를 실패케 하는 원인이 된다. 
세상에는 해보고 실패하는 사람보다 해보지도 못하고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지연하다가 늦게 되고,늦은 뒤에 후회하는 것이다. 실패자의 핑계는 바로 지연하다가 못하는 경우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기회가 있다. 승진 투자처럼 눈에 보이는 기회가 있고 감추어져 있어서 눈과 귀로 탐색해야 보이는 기회도 있다. 이런 기회는 늘 깨어 있어야 보이고 잡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탄의 지연작전에 빠지지 않고 성공하려면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또 흐지부지 하지 말아야 하고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해보지도 못하고 지연하다가 실패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 ⑨ 불성실 

사탄의 아홉번째 전술은 불성실이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사탄은 자신의 일에 부지런한 사람들을 유혹하지 않고 항상 게으른 사람 즉,불성실한 사람들을 골라서 유혹해 이용했다. 
다윗이 범죄를 저지른 것 역시 부하들이 모두 전장에 나가 국가를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을 때 혼자서 지붕 위를 거닐고 있다가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 지도자로서 불성실했을 때 범죄한 것이다. 그래서 벤저민 프랭클린은 “정직과 성실을 그대의 빛으로 삼으라. 백 권의 책보다 하나의 성실한 마음이 더 큰 힘으로 사람을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성실이 성공의 친구이듯 불성실은 실패의 가장 친한 친구다. 비록 성공했더라도 불성실한 사람에게는 그 성공이 오래 가지 못한다. 반대로 성실한 사람은 실패했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일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실한 사람은 실패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 실패는 결론이 될 수가 없고 재도전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패는 성공을 위한 주춧돌이며 새로운 도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의 지표로서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시 37:3)고 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노동자의 윤리로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시골에 가면 농부가 많이 사용하는 기구 중에 낫이 있다. 이 낫은 사용하지 않고 놓아두면 녹이 슬지만 매일 사용하는 낫은 결코 녹이 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탄 마귀는 불성실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유혹을 할 수 있지만 성실한 사람들에게는 유혹의 틈을 만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시 31:23) “성실은 자기를 인도”(잠 11:3)하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은 항상 노력하고 열심히 뛰어다닌 사람이다. 물론 세상에는 복권에 당첨되거나 도박에서 거금을 따는 등 뜻밖에 횡재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수억 분의 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성실만이 성공을 만들어내고 사탄의 유혹을 피할 수 있다. 

★ ⑩ 외식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외식이다. 왜냐하면 외식은 천국 가는 길을 막는 마지막 전술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성경 읽는 것,교회 가는 것과 봉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막을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마지막 무기가 바로 외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기도를 외식으로 하게 하고 성경을 외식으로 읽게 한다. 교회 출석을 외식으로 하게 하고 봉사를 외식으로 하게 한다. 여기서 바리새인 같은 신자가 나오고 위선자가 나온다. 
종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외식주의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한 것은 그들이 일반 사람보다 더 악하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지도자로 있으면서 외식에 사로잡힐 때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사탄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방법이다. 우리가 이단을 구별하기 어렵고 막기 힘든 것은 외식 때문이다. 그들의 간판은 항상 정통이고 성경이며 경건이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무엇이 되기보다는 어떻게 보이기를 더 원한다는 데 있다. 행복하게 되기보다는 행복하게 보이기를 더 원하고 선하게 되기보다는 선하게 보이기를 더 원한다. 우리의 유교적 전통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외식주의적인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외식이란 누룩과 같아서 그냥 있지 않고 점점 부풀어 번져 가기 때문에 신앙인에게 가장 무서운 독소인 것이다. 베드로의 편지를 보면 말세의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식이라고 했다(벧전 2:1). 그러므로 사탄의 외식전술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